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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는 기억에대해

히저리 2023. 10. 2.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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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십년 가까이 만났던 사람이 있었다. 캠퍼스커플로 풋풋했던 대학시절을 함께 보냈고 군대에 간 남자친구를위해 고무신이되어 처음으로 삼단도시락을 싸들고 면회를가기도 했다. 군대에서는 편지가 전부라는 말을듣고 주눅들까봐 단 하루도 빠지지않고 매일 2년 가까이 남친에게 편지도 써봤다. 남자친구는 포상휴가를 받으려고 뭐든 기를쓰고 달려들었고 그 덕에 휴가를 자주 나올수있었다. 
 
그당시 사정이있어서 캐나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함께 가지못했고 그대신 나는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다. 캐나다에 함께 가지못했던게 아쉬웠지만 그때의 결정이 지금 내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지금처럼 메신져가 없었던때라 국제전화비가 매달 무시무시하게 나왔지만 우리는 개의치않고 매일 통화를했다. 셀수도없는 수많은 날들을 같이보냈고 소중한 추억들을 쌓으면서 어느덧 우리의 20대를 지나왔다. 마치 20대의 그사람을 지우면 나의 20대가 없는것처럼. 우린 어렸지만 서로에대해 신뢰가 참으로 깊었다.
 

어쩌다 나는 호주까지와서 살게되었다. 퇴근하는 길. 몸은 피곤한데 아침공기는 참 상쾌했다. 해가 점점 길어지고있다.

 

이제 곧 여름이 온다 푸릇푸릇하네. 퇴근길이 즐겁고나...ㅎ

 
우리도 여느 평범한 청년들처럼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를다니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말라고 했던가.. 내 경우가 그랬던것같다. 사회 초년생으로 각자 살아남기 너무 바빴고 서로의 힘듦을 깊게 들여다보지 못했다. 20살때처럼 마냥 좋을수가없었다. 만난지 10년째 되던해… 반복되던 사소한 싸움에 지쳤을까,, 우리는 그 길었던 연애의 종지부를 찍고 각자의 길을 가기로했다. 그전에도 헤어지고 다시 만난적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진짜라는걸 우리는 이미 알고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사람을 너무 일찍만났고 모든게 준비되지않았었다. 우리는 더 성숙하지 못했다. 그 사람을 20대후반에 만났으면 아마 지금 내옆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거지만.. 그렇게 헤어지고 2년에 걸쳐 이별의 아픔을 아주 혹독하게 견뎌야했다. 3개월은 거의 울다시피 지냈으면서도 어느 누구도 먼저 연락하지않았다. 시간이 해결해줄거라 생각했던것이다.  다시 마음이 약해져서 돌아가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뿐이라며,,,그렇게 2년 가까이 넋나간 사람처럼 살았다. 나는 정말 몰랐다. 그 사람을 잊고 원래의 내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2년이나 걸릴줄은… 그때는 정말 몰랐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울컥한다. 억척스럽게 참고 참고 또 참았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고문같았던 시간이 지났다. 
 
헤어지고 5년 즈음 지냈을 무렵 우연히 그 친구가 보낸 메일을 발견했다. 나는 해외에서 근무하고 있을때였다. 이제는 쓰지않는 이메일인데 찾을것이 있어서 몇년만에 열어봤다가 그 사람이 보낸 편지를 발견하고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수많은 스팸메일에 묻혔을수도 있었는데 그날 첫페이지에 바로 보였던게 어떤 신의 계시였나.. 이제는 만나서 서로 안부정도는 주고받아도 되지않냐는… 
그래도 내 20대의 전부를 함께 보낸사람인데 어떻게 살고있는지 정도는 궁금했다. 그렇게 한국에 잠깐 들어갔을때 한번 만났다. 헤어지고나서 그도 나만큼이나 힘들었다는것도 알게되었다. 우리는 그 가혹한 시간을 혼자 무식하게 견디는 독하디독한 성격마져 닮아있었다. 그래도 잘 지내고있는듯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나에게는 그사람을 추억하게하는 노래들이 있다. 우연히 어디선가 그 노래가 들려오면 그때의 풋풋했던 우리가 기억난다. 그리고 슬며시 미소를 짓게된다. 아련했던 내 20대… 어딘가에서 잘 살고있을 그 친구… 좋은사람 만나서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한때 그누구보다 소중했고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했던 사람이었고 내 20대의 전부 였으니까… 당신은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기억은 너무나 다른 두개의 얼굴을 하고있다. 잊고싶지않은 기억과 잊고싶은 기억… 소중한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은 그 사람과의 추억과 얼굴이 더 이상 기억나지않을까 두렵다. 사진을 몇번이고 들여다보고 그 사람과의 추억을 자꾸 되뇌어본다. 사무치게 보고싶은 사람인데 그 사람얼굴이 더이상 기억나지 않을까봐 무섭다…하지만 세월은 무심하게도 우리의 기억을 기어이 흐릿하게 만들고 만다.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들을 잊지않고 평생 기억할수있게된다면 나는 그 길을 선택할것인가.. 평생 그 사람을 추억할수있어서 행복할까…과거의 추억들이 내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될까…힘들때 꺼내보면서 기운내는 지갑속 가족사진처럼..? 트라우마에 고통받는 사람들은 또 어떤가. 자신이 겪은 끔찍한 경험을 잊기위해 안간힘을 쓴다. 잊으려고하면 할수록 악몽같은 기억들은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할수만있다면 그 일이 생기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날의 기억은 어제 일어난것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 
 
잊고싶은 기억이든 잊고싶지않은 기억이든 시간이 지나면 보내야한다. 그래야 그 추억이 더 아름답고 소중하게 느껴질테고 설령 그 기억이 흐릿해지다못해 없어진다할지라도 그마저 받아들여야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도 앞으로 나아갈수 있겠지..좋은것도 나쁜것도 다 기억저편으로 보내야 내가 살아갈수있다. 그래서 조물주가 우리의 기억력을 너무 좋게 만들지 않았나보다. 모든기억이 내 머릿속에 평생 저장된다면 정상적인 삶을 살기 어려울테니까. 보내야할 기억은 보내고 새로운 추억들이 그자리를 대신하도록.  그때의 추억과 그사람과 함께했던 날들만큼은 충분히 행복했으니 그거면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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